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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25. 쉴라 제프리스의 『젠더는 해롭다』 출간에 부쳐

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리즘을 상호배타적인 것으로 설정하는 제프리스의 주장 기반은 이렇듯 ‘젠더’를 개념화하는 방식에 있다. 이러한 개념화는 여러 면에서 대단히 문제가 있다. 먼저 그는 젠더 정체성, 젠더 스테레오타입, 젠더 위계 등 서로 다른 개념을 ‘젠더’라는 용어 하나로 교묘히 통합시킴으로써, 젠더 개념이 시대적인 맥락 및 운동의 역동에 맞추어 변화하고 정교화되어 온 역사를 모두 해프닝, 즉 ‘섹스’라는 근원적인 범주 하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발생한 해프닝인 양 일축해버린다. 젠더 정체성, 젠더 스테레오타입, 젠더 위계 등은 각각 ‘젠더’ 개념을 구성하는 다양한 층위이나, 그 자체로 젠더와 등치 될 수 없다. 또한 젠더를 단순히 젠더 정체성이나 젠더 스테레오타입들을 표지하고 포괄하는 중립적인 단어로 볼 수도 없다. 오히려 젠더는 “사회적으로 인지된 두 성들 간의 관계에 대한 지식”으로(Scott 1988: 42-44), ‘여성성’ 혹은 ‘남성성’이라는 관념을 생산함으로써 특정 존재를 ‘여성’ 혹은 ‘남성’으로 표지하게끔 하는 일련의 과정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개념적 도구로 이해되어야 한다. 제프리스는 분석적 도구로서의 젠더가 분석 대상으로 삼는 젠더 정체성, 젠더 스테레오타입 등을 젠더의 하위 범주인 것처럼 포섭시킴으로써 범주 혼동을 유도한다. 따라서 젠더 정체성, 젠더 스테레오타입, 젠더 위계가 모두 ‘해로운’ 것이므로 젠더 역시 ‘해롭다’는 논증은 성립 불가능한 범주적 오류이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보부아르의 명제는 생물학적 결정론의 족쇄로부터 여성을 해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제프리스는 이 생물학적 결정론을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기꺼이 환영하면서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생물학이라는 운명을 다시 여성들 앞에 내려놓는다. 이러한 주장은 가장 ‘근본적(radical)’인 원인을 찾아냄으로써 페미니즘 운동의 동력을 생산하는 전략인 듯하지만, 실제로는 남성을 억압의 주체로, 여성은 억압의 객체로 고정하면서 이 억압적인 체계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불안과 공포를 확대 재생산한다. 이는 여성에게 체현된 억압의 구조와 배경을 밝히기 위해 억압자로서의 남성-피억압자로서의 여성 구도를 강조하는 논리로, 억압의 원인과 결과를 서로 물고 물리는 자기 반복적 구조로 설명한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여성이 억압받는 이유는 그가 억압받는 성별인 여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이고, 또 여성을 여성이라는 집단으로 정초시키는 것은 그가 억압을 받는 성별로 태어났다는 사실 뿐이다. 이러한 자기 반복적 순환 논리가 페미니즘 운동의 동력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 그로부터 우리가 실질적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진지하게 되물을 필요가 있다.

원문 읽기: https://fwdfeminist.com/2019/10/02/critic-3/

※ 참고: https://twitter.com/incheonwomen1/status/11583137427376578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