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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29. 쉴라 제프리스 초청강연 [젠더박살 프로젝트] 참여 후기

‘트랜스젠더가 여성성 또는 남성성을 강조한다.’ 완전히 틀린 말만은 아니다. 다만 트랜스젠더라서 성별 이분법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트랜스젠더의 성별성도 사회에서 용납되는 언어와 행동을 반영할 뿐이다. 이것은 비트랜스젠더도 마찬가지 아닌가? 왜 트랜스젠더에게만 정치적 올바름을 강요하는가? 트랜스젠더만 이상적인 기준에서 평가하는 것은 극히 불공평하다. 더불어 대다수의 트랜스젠더에게 남성성과 여성성은 생존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자신의 젠더 표현에 맞는 패싱이 안됨으로써 야기될 폭력과 불이익에 맞서기 위한 위장이다. 물론 여성 인권을 위해 앞장서는 트랜스젠더도 많다. 하지만 모두가 이런 활동이나 운동을 할 여력이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고정관념으로 고정관념에 맞서는 건 페미니스트로서 위선적인 행동이 아닐까? 트랜스여성은 전부 성적 판타지에 갇힌 변태일 뿐이자 자기여성애자(autogynephile)이고, 트랜스남성은 여성이기 때문에 받아야 하는 억압으로부터 도피하는 ‘트랜스젠더하는’ 이들. 이런 묘사들이야말로 편견의 씨앗을 뿌리는 행위인 것 같다.
문제는 트랜스남성의 월경/임신은 분명히 존재함에도 비가시화되고 심지어 당사자들 사이에서도 터부시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트랜스남성 당사자들은 기존의 제도와 지원 체계에서도 사각지대에 놓여 있고 의료적 지원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쉴라의 바람과는 다르게 월경/임신의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남성이라 표기된 신분증을 지니고 있고 남성으로 인식되는 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현실에 존재합니다. 

물론, 단어 하나를 성중립적으로 바꾼다고 이러한 터부와 비가시화가 한 순간에 뾰롱 하고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는 주류의 언어이며 사회가 무엇을 정상적으로 여기고 있는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언어에서 소외되는 이들은 기존의 제도와 담론에서도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입니다. 페미니즘 담론에서 자궁을 포궁이라 지칭하는 등 대안적 언어를 고안하고 사용하려는 움직임과 비슷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젠더는 해롭다> 번역본에서도 ‘아내’가 아닌 ‘여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지요. 
쉴라와 자매들이 모여 ‘다른 자매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그 자리에는, 적어도 둘 이상의 트랜스젠더이자 페미니스트인 개인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의 표현대로라면 ‘여성 신체 트랜스젠더’에 해당되는 FTM 트랜스남성인 저를 두고 존재 자체만으로 여성주의의 배신자처럼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트랜스젠더인 저에게 있어 제가 삶을 지속하는 데에 가장 해로운 것은 젠더도 무엇도 아닌 가부장제라는 것입니다. 제 삶에는 소위 말하는 ‘여성 신체’로 인식되는 몸을 가지고 살아왔기에 요구받았던 규범과 낙인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부장제-이성애-정상성 중심의 규범은 트랜스젠더인 제 몸에도 낙인을 찍습니다. 

제가 제 몸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단어는 트랜스젠더였고, 그래서 저는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하기를 선택했습니다. 쉴라는 ‘여성 신체 트랜스젠더(트랜스남성)는 여성 신체로 살아가며 생겨난 방어 기제와 탈출 통로로서 트랜스젠더가 되기를 선택하였다’고 설명하지만, 트랜스젠더인 제 몸 또한 여전히 이 가부장제 사회 안에서 정상성 규범에 맞춰나갈 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때때로 제 몸은 트랜스젠더이기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몸이 됩니다. 때로는 (트랜스) 남성이기에 어떠한 정상성의 틀과 규범에 맞추기를 요구받으며, 누군가의 시선에서는 (생물학적) 여성이기에 폭력에 노출되기도 합니다. 

원문 읽기: http://transgender.or.kr/xe/60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