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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30. 쉴라 제프리스의 『젠더는 해롭다』 출간에 부쳐: 트랜스젠더리즘은 해롭다?

제프리스는 트랜스젠더 운동의 역사와 성격을 설명하는 과정에서도 문제를 보인다. 앞서 살펴보았듯, 제프리스는 트랜스젠더리즘이라는 용어가 갖는 사회변혁적인 성격을 지워버림으로써 이를 ‘개인적인 문제’로 환원해버린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들이 전제하고 있는 ‘개인’과 ‘운동’, ‘정치’에 대한 이미지는 매우 협소하고 자의적이다. 이는 70년대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목표, 즉 개인의 자율적 선택 혹은 욕망으로 설명되어 왔던 현상들이 실은 사회적 맥락을 통해 규범적으로 구성된 것이었음을 밝혀내는 작업의 의의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또 제프리스는 트랜스젠더리즘을 페미니즘, 그중에서도 급진주의 페미니즘으로 대표되는 제2물결 페미니즘과 완전히 별개의 흐름인 양 설명하지만, 양자의 관계는 단순하게 딱 잘라 설명될 수 없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부과된 규범 혹은 억압으로서, 즉 후천적인 구성물로서 성별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각각 다른 방향에서 이성애중심성에 도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친연성을 지닌다. 성기로 대표되는 생물학적 특징은 ‘성별’의 사회적인 인지와 필연적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사회적 표지로서의 여성성/남성성과 여성/남성 신체, 욕망 역시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견고한 공식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낸 데 트랜스젠더 운동의 영향이 지대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트랜스젠더들의 경험, 그중에서도 자신의 성별을 인지하는 데에서 오는 위화감은 제프리스의 주장이 갖는 허점을 보여준다. 성별 정정 수술이나 호르몬 투여 등 의료적 조치를 취하기 전부터 그 이후까지도 트랜스젠더들은 몸에 대한 혐오감, 또래나 지지집단으로부터의 고립감과 배제, 불안, 우울 등의 고통을 겪는다. 이러한 현상은 MTF 트랜스젠더들이 겪는 문제가 단순히 의도된 선택과 조절의 차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이들의 경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개개인들을 둘러싼 몸과 무의식, 욕망의 영역을 반드시 다룰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나 제프리스는 MTF 트랜스젠더들을 오로지 ‘여성성’을 유리하게 활용하는 모습으로만 포착하며, 이 외에 이들이 겪는 문제들을 이해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이론의 이름을 빌려 트랜스젠더에 대한 몰이해와 혐오를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기반이 된다.
제프리스는 트랜스젠더에 관련된 모든 주장에서 MTF를 여성성을 재생산하는 남성으로, FTM을 남성성을 숭배하는 여성으로 호명하면서 트랜스젠더를 출생 시 지정된 성별로 다시 돌려놓는다. 트랜스젠더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전략을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제프리스는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부정하는 동시에 트랜스젠더를 가해자의 위치에 둔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무언가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의 존재와 위치를 인정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제프리스의 논의는 생산적 결론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같은 자리만을 맴돌고 있을 뿐이다.
제프리스는 트랜스젠더가 마치 젠더 이원론을 생산하거나 강화하고 있는 것처럼 주장하지만, 사실 트랜스젠더를 트랜스젠더로 표지하는 것은 젠더이원론과 그에 따른 사회적 기대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현실이다. “트랜스젠더는 해롭다”라는 주장으로 제프리스는 “트랜스젠더임을 공개하고 살아온 사람들이 겪는 차별과 폭력을 의도적으로 망각”하고(Butler, 2015[2004]: 23), 그들을 가해자로 지목한다. 견고한 구조의 피해자를 가해자로 위치변경하는 제프리스의 주장은 오히려 이원적인 젠더 관계를 당연시하고 이 관계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거나 그릇된 것으로 만듦으로써 더 이상 논의를 진행할 수 없도록 하는 비생산적일 주장일 뿐만 아니라, 비윤리적인 주장이다. 

원문 읽기: https://fwdfeminist.com/2019/10/31/critic-4/